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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역사 한눈에 보기 본문
여러분, 안녕하세요
마케팅 5년차 Job지식 김쌤입니다.
※이 블로그는 주관적인 생각과 경험담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은 60년 전 대한민국에서 4·19 혁명이 일어났던 날입니다.
아직 4·19 혁명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보겠습니다!
대한민국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통치로부터 해방이 됩니다.
해방 이후 국가를 재건하고,
1948년 7월 20일 첫 대통령 선거가 열립니다.
당시 선거는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것이 아닌,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이 투표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첫 대통령 선거에는 세 후보가 출마하게 됩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이승만,
한국독립당 소속 김구,
무소속 안재홍.
당시 국회의원 198명 중 196명이 투표하여,
득표수 180표로 이승만 대통령이 당선됩니다.
그렇게 당선된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입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운동가로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선거가 끝나고 바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창설됩니다.
이 조사위는 친일행위자를 찾아서 처단하는 조사를 진행했는데요.
이 청산이 친일파와 이승만 정권의 방해에 의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1949년 해산이 됩니다.
그리고, 그 해 김구 선생님이 암살을 당하게 되는데요,
김구 선생님의 암살이 이승만 대통령과 연관이 있다는 여론이 확산됩니다.
이승만 정권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국회의원 선거를 미루려 했으나
미국의 국무장관의 강력한 경고로 미루지 못하고 치뤄지게 됩니다.
그런 비판 여론이 퍼진 상태에서 1950년 국회의원 선거가 시작됩니다.
당시 2대 국회의원은 기존 정치인이 아닌 지역 유지들이 앞다투어 출마하게 되는데요.
그로 인해 무소속 출마자가 다수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렇게 당선된 국회의원은 총 210석 중 무소속이 126석(60%)으로 앞도적이였습니다.
그리고 다음달 바로 6.25전쟁이 터집니다.
전쟁으로 인해 2년의 시간이 흐르고,
제 2대 대통령 선거의 시기가 돌아옵니다.
이승만 정권은 선출된 2대 국회의원 중 자신의 정치 세력이 없자,
대통령 선출방식을 국회의원이 선출하는 간접선거에서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직선제로 변경합니다.
1952년 8월 5일 전쟁중에 2대 대통령 선거가 치뤄집니다.
여기서 이승만 정권이 그냥 직선제로 변경하진 않았겠죠?ㅎㅎ
바로 폭력조직과 여러 수단을 동원하여 반대세력의 투표를 방해하게 됩니다.
그러곤 기습 표결을 진행하여 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데요.
이 사건을 부산정치파동이라고 불립니다.
부산정치파동은 당시 전쟁으로 인해 수도가 부산으로 옮겨진 상태에서
발생하여 부산이라는 지역명이 붙게 됩니다.
2대 대통령 선거는 74.6%의 득표율로 이승만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됩니다.
전쟁 시에는 사람의 심리가 집권여당을 바꾸지 않는다고 하네요.
그렇게 1953년 6.25전쟁이 휴전이 되고,
1954년 5월 20일 제3대 국회의원 선거가 시작됩니다.
이때 곤봉선거라 불리게 되는데요,
이승만 정권이 자신의 세력이 아닌 자가 출마하면 온갖 고문을 통해 끌어 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산정치파동에서 활약한 청년단체 임원과
친일파 출신들이 대거 대선에 뛰어들었다고 하네요.
이들과 함께 이승만 정권이 결성한 자유당이 나오고,
제3대 국회의원 선거는 자유당이 114석(56.2%)을 가져갑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선거에서 투표율이 94.4%라는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당시 민주당 신익회 후보와 무소속 조봉암 후보와 함께
경쟁을 하게되는데, 유력한 후보였던 신익회 후보가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결국 이승만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됩니다.
이때, 사사오입 개헌이라는게 나옵니다.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 3선 금지 조항을 폐지하기 위해 법을 개정하려 시도합니다.
개헌을 통과시키려면 국회의원 203명 중 2/3 이상의 찬성을 받아야하고,
203명의 2/3이 135.3333명으로 136명이지만,
사사오입이라는 기발한 발상으로 소수점은 버리고 135명만 찬성하면 된다고 우긴 사건입니다.
쉽기 말해 반올림한 것이죠~
또한, 북진통일을 시도하려 하였고,
조봉암 후보가 평화통일해야한다고 발언 후 빨갱이라며,
1959년 7월 31일 사형을 집행합니다.
1960년, 4대 대통령 선거가 돌아옵니다.
이승만 정권은 온갖 부정부패를 자행하여,
민심이 돌아선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더 권력을 잡기 위해
사전투표, 대리투표, 3인조 공개투표, 야당 참관인 몰아내기 등
이상한 수법을 사용하며 자유롭게 투표하지 못하도록 했는데요.
그렇게 투표권을 박탈하니,
2월 28일 대구에서 처음으로 고등학생이 투표권을 달라고 시위를 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2.28 대구 고등학생 시위입니다.
그리고 선거일인 3월 15일,
마산에서는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립니다.
이렇게 민심이 들끓고 있는데도
이승만 정권은 부정부패를 이용해 다시 한 번 정권을 잡게 됩니다.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학생의 시신이 눈에 최류탄이 박힌체 발견됩니다.
이때부터 다시 민심이 들끓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4월 19일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고,
어린 학생들부터 어른들까지 시위에 참가하게 됩니다.
계속해서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장악하려 했던 이승만은 결국 하야하게 되는데요.
4.19 혁명은 자유와 정의, 그리고 민주주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참여인원만 10만명 이상이였으며,
무력 충돌로 인해 사망자 180명 이상, 부상자 1500여 명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한 지금,
앞서 희생되신 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가 편히 살고 있을까요?
4.19 혁명으로 희생되신 분들께 감사를 표합니다.
지금까지 Job지식 김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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